청요직
고도로 발달된 관료 체계를 갖춘 조선시대의 관리들에게 승진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하지만 관직의 품계와 관계없이 선비라면 누구나 가고싶어하는 자리가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이른바 청요직이다. 청요직은 시대에 따라서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대개 사헌부의 장령 1인, 홍문관 당하관 12인, 이조전랑 6인, 예문관 한림 8인을 지칭한다. 이들은 결코 품계가 높지는 않았으나 고위직 관리를 견제하는 역할을 했기에 남다른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 자부심의 배경에는 탐관오리의 자손은 후에 사면을 받아도 절대 오를 수 없느 관직 이라는 점도 기인했다. 그래서 2품(육조판서) 이상의 고위 관직에 오르지 못해도 청요직을 제대로 수행한 조상이 있다면 그 가문은 명문가로 인정을 받았고 백성과 선비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삼사 - 홍문관, 사간원, 사헌부 조선의 선비들을 삼사의 수장이 되는 것을 영예롭게 생각했다. 왜냐하면 의정부와 육조의 으뜸벼슬, 즉 삼정승과 육조판서는 과거 시험을 치르지 않고도 임명될 수 있는 자리였던 것과 달리, 삼사의 관리들은 과거시험을 통해 벼슬에 진출한 사람만이 갈 수 있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홍문관은 조선시대 청요직의 상징으로서 '옥당'으로 불리며 모든 선비들이 가장 가고 싶어 하는 관직으로 손꼽혔다. 실제로 홍문관 관리를 제대로 수행하면 비록 낮은 품계라도 친족에게 벼슬길을 내주는 음서가 공식적으로 시행되었다. 또한 정승, 판서 등 고위관리들은 거의 예외없이 거쳐간, 진정한 엘리트 출세 코스였다. 왜? 선비들이 선망하는 관직이 된 걸까? 홍문관의 기본 역할은 궁중의 경서, 사적의 관리, 문한(문장을 작성하는 것에 관한 일, 또는 글을 잘 짓는 사람)의 처리 및 임금에게 자문을 하는 일이다. 임금의 자문에 응하는 임무 때문에 품계는 낮지만 임금을 볼 기회가 잦았고, 조정의 옳고 그름을 논하거나 간언하는 입장에 있었으므로 영향력이 막강하였다. 흔히 사헌부, 사간원과 더불어 언론삼사라고 불리는데, 사헌부와 사간원이 함께 탄핵을 해도 임금이 그 간언을 듣지 않으면 마지막으로 홍문관이 합세하여 간언하였고, 삼사가 함께 간언을 올릴경우 임금은 이를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